때가 되었다 / 박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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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130회 작성일 17-08-28 15:24본문
때가 되었다
박판식
1
그 여름 나는 하늘과 땅이 하는 소리를 다 들었다
바윗돌이 고함치는 소리와 붕어와
자라가 대야 속에서 귓속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팠고 내 영혼은 거지꼴이었다
대로의 사건은 퇴역 장교 최의 모자를 허공으로 날려 버렸고
나는 사람이 죽어 쌀자루 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2
아내와 나는 같은 세숫대야에 얼굴을 씻지 않는다
아들과 딸 하나씩을 발명하고 우리는 기진맥진이다
작은 호랑이처럼 헐떡이는 아이들
김이 다 달아난 밥 한 공기를 놓고
위층에 새로 세든 불행한 엄마와 그녀의 엄마가 차례로
벽에다 그릇 던지는 소리를 듣는다
3
내일은 넋이 빠져나간 외할머니를 보러
시외버스를 탈 것이다
죽음은 어떤 장소도 시간도 아니다, 죽음은 오히려 반듯한 질서
구포국민학교 2학년 오후반 이후 나는 늘 지각 중이다
누가 X를 죽였는지, Y와 Z는 언제 죽을 건지 곰곰이 따져 보다가
딸의 기저귀 가는 소리, 어린 아들의 화장실 슬리퍼 끄는 소리에 놀라
질척이는 꿈에서 깬다
4
나는 내가 노래한다 믿었으나
사람들은 내게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을 들었다
지금 시간 오후 세 시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아시아경제> 「오후 1詩」(2017.7.12)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산문집 『날개 돋친 말』
2014년 김춘수시문학상, 통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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