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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세계 / 서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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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2,655회 작성일 17-11-20 09:21

본문

 

수의 세계

 

   서윤후

 

 

   1.

다음부턴 침묵을 동반하시오

그리고 끌려다니시오 마음껏

공짜니까

 

   2.

목소리만이 윤곽인 숲으로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다

눈먼 자의 증언을 받아 적다가

내 것으로 베껴 쓸 날도 머지않았음을 알 때

숲을 지나야만

숲이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3.

나의 종교는 와해된 지 오래되었다

이것으로 선언문은 시작된다*

 

   4.

물결치는 고요

성벽 따라 걷는 사람들

아무도 심판받지 않는 심판자들의 도시에서

그 누구도 일기를 쓰지 않는다

사람을 들키길 두려워하는 손만이

이 도시를 빚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벌벌 떨고 있다

 

   5.

나는 나의 반역자로서 내 편에 설 것이다

나를 지지하며

눈먼 자가 되었을 때

이 숲을 그대로 들려줄 것이다

복원 가능한 슬픔에는

지렛대가 없다는 사실도

 

견디라고 말하는 쪽으로 침을 뱉으면

아프다고 말하는 쪽이 젖는다

 

   6.

늦었다고 말하는 동안 늦은

새들이 잘못된 계절에 맞춰 고쳐진다

둥지는 생활을 잃고

찌르기 쉽게 날카로워진다

 

   7.

사람들 가슴엔 쿠데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보도되지 않는 슬픔을 애써 겨루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이 싸움만 지속하는

안전한 전쟁을 지연시키며

살아 있다는 암호를 풀지 않는다

땅속에 뿔이 자라나고 있기에

침묵의 목줄을 끊기 위해

 

숲에는 누가 버리고 간 귀들이

비리도록 우리를 엿듣고 있다

 

   8.

침묵을 벌로 선택한 당신에게

오랫동안 소란이고 싶다 

 

 

 

  * 서로가 서로에게 몰랐던 사실을 말했다. 상처로 함몰되었던 시간은  #문단_내_성폭력으로 폭로되었다. 가해자는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이 선언문은 더 많은 질문들로 채워질 것이며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사회》2016년 겨울호

 

서윤후1.jpg


1990년 전북 정읍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현대시등단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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