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묘에 몸 대신 울음을 눕히고 / 주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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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398회 작성일 17-12-14 10:23본문
가묘(假墓)에 몸 대신 울음을 눕히고
주영헌
충북 보은군 수한면 발산리 보은태생 新安朱氏 선산, 이곳에 내 몫의 묫자리[假墓]가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속 빈 강정처럼 빈, 그 속이 출출해 보여 몸 대신 뚝뚝 떨어지는 울음을 채워 넣었습니다. 울음을
꼭꼭 즈려밟고 봉분 위에 섭니다. 저쪽 계곡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야숙(野宿)하듯 눕기에 편안한
명당입니다.
나무 그림자가 다리를 슬쩍 걸칩니다. 작은 잎사귀 하나 살랑 바람 곁에 몸을 걸칩니다. 할미꽃도
민들레도 짝을 맞춰 피었습니다. 바람도 나무도 꽃도 이 자리가 참 좋은 모양입니다.
비석도 없는 墓라니 여간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 석 자 적어 비석을 세웁니다. 아직 죽은
것은 아니니 學生府君神位라고 적지 않고 生者神位라고 적었습니다. 묘비에 生者라니 허망한
망자의 욕심처럼 보입니다. 生者를 지우려다 바로 墓속에 누워야 할 것 같아 그냥 놔두었습니다.
사람은 한세상 욕심으로 산다지요. 누군가 본다면 속으로 욕하더라도 망자의 마지막 욕심이니
눈 감아 주겠지요.
저 墓, 누구의 墓입니까. 내 울음의 墓입니까. 아니면 육신의 墓입니까.
그래도 저 墓, 봄 되면 꽃 활짝 피고 초여름 떼도 무럭무럭 자라나겠지요. 그러다 붉은 잎사귀
따뜻이 떨어지고 한겨울 함박눈 흠뻑 내리면, 보기는 참 좋겠습니다.
당신에게도 모든 울음 꼭꼭 채울 수 있는 저런 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월간 『시인동네』 2017년 12월호
1973년 충북 보은 출생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9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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