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역에서 / 장옥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49회 작성일 18-01-19 16:36본문
수유역에서
장옥근
서정춘 시인이 사십 년 걸쳐 썼다는 종소리가
지하 수유역에도 가루가루 우는데
수유역 4-4구역 의자에
부러진 삭정이처럼 노인이 누워 있다 마디마디 풀려서
팔과 다리가 축 처지고 눈을 닫아 버렸다
더 가야 하는데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지? 철들지 않을 때부터 달려왔는데,
수유3동 콩나물 놀이터 옆 에미 없는 일곱 살 다섯 살
손주들이 있는 청안빌라 내 집까지 가야만 하는데
짧은 겨울해가 붉게 멈칫거리는 북한산에
검은 까마귀 한 마리 길게 날아간다
단단해져야 할 세월을 한 귀퉁이도 무심으로 넘지 못했으니
가느다란 바지 끝에 찬바람이 스칠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내 삶 한 켠에 자라나는 올망졸망 다섯
내 새끼들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얼마나 손마디 굵은 시간들을 보냈던가
예기치 않는 곳에서 불쑥 삶의 끝자락을
마주한 그가 지금
어느 날 지하철 창문에 스치듯 비치던
제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눈을 감은, 벙그러진 입속으로
어머니의 붉은 젖꼭지가 들어온다
- 장옥근 시집 『눈많은 그늘나비처럼』(2017, 문학들)에서
전남 구례 출생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13년 《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 『눈많은 그늘나비처럼』 등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