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 / 조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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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048회 작성일 18-03-27 08:48본문
소만 (小滿)
조 정
어머니 저는 벌써 비파나무 그늘에 와있는 걸요
귀 없는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부르는 노래
하늘은 이파리 사이에 비파 열매 두세 개 놓은
상(床)
아침 먹고 백옥같이 삶아 널은 베갯잇이 날아가
나무 그늘에 앉았다
아가, 어느 골짝이냐
책상에 놓인 교복 단추 하나 쥐고 안 가본 데 없이 가봤다
사람 묻었다고 수군거려진 자리 다녀온
날이면
힘껏 당겨 묶어서 겨드랑이 해진 빨랫줄에
피 묻은 길을 빨아 널었다
많이 다쳤드냐?
선불에 끄슬러 초록 물방울 같이 비빈 풋보리 알을
열무지 담는 내 입에 톡 털어 넣어주던
너에게
이 열무로 지 담아
저 이쁜 비파들 편에 들려 보낼까?
아아, 길에는 혀 붉은 개가 나올 시간이다
달리는 차에 새끼를 잃은 개는 달리는 차를 붙들지 못하고
날마다 길을 핥아
제 신음을 적시러 온단다
아래는* 먼 포구에 갔다
흰 텐트가 줄지어 서 있었다
문 열어라 물아
문 좀 열어다오 물아
어미들은 물가에 허리를 접고 웅얼거렸으나
바다는
천남성 꽃잎처럼 냉랭했다
해식애를 돌아 동거차 선착장 찾아온 딸 하나
제 품에서 건져
쾌속정에 태워 보내줄 뿐이었다
헬리콥터는 프로펠러가 꺾인 채 날아가고
허공에 금이 가고
날카로운 비명이 폭우처럼 새어나갔다
등이 아프다
누가 내 곁에서 자기 시작했다
돌절구를 지고
입 다문 지 오래된 물속을 자맥질하는 잠
해초 냄새 나는 아이들이 밤새 몸 안을 사무쳤다
어디로 가야 너를 찾으끄나
뜰 안에는 비파가 노랑노랑연두연두 익어간다
슬픔을 일습 흠 없이 갖추어 입은
배 한 척이
집에 가득하다
*아래 : 그저께를 가리키는, 경상도 말.
-《시산맥》(2017, 여름호), 제8회 시산맥작품상 후보작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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