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 이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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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679회 작성일 18-05-02 11:10본문
드라마
이동호
승강기를 타는데 앞서 탄 여자가 나를 보고 흠칫 놀란다
나를 치한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사람 좋은 표정으로 한번 웃어주려다가 승강기 벽면에 광고지처럼 붙어선 여자를 보며
또 괜한 악당이 된 것 같아 그만 둔다
승강기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 덕분에 전 생애를 펼쳐놓고 빠르게 훑어보지만,
내 어디에도 흉포함이나 공격성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자는 잠시 본 것만으로 나도 모르는 나의 육식성을 찾아낸 것이다
인상 좋은 사람으로 수십 년 살아오다가 최근 어디쯤에선가 무언가를 묻혀온 것만 같아
몸을 벗어들고 탈탈 털고 싶어진다
오늘따라 승강기 벽면에 비친 나까지 나를 어색하게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나의 불편함에 더 불안해진 여자가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어딘가로 도움을 요청하는 문자라도 보낼 모양이지만,
승강기 안이라는 것이 참 다행한 일이다
밀폐된 공간에 여자와 단 둘만 있는 것이 남자들에게 결코 신혼 첫날밤 같지 않다는 것을,
여자들은 알기는 할까
여자의 불안함 속에서 나를 떼어내 여자의 가장 먼 곳 벽에 전단지처럼 붙여놓는다
낯선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두려움을 이해하지만,
낯선 여자를 안본 듯 훑어보는 남자들의 서툰 연기력에 악의가 없음을 여자들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남녀관계가 그렇듯 함께 타고온 승강기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먼저 내린다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여자는 고개 숙인 채 달아나고,
뭔 일을 겨우 치러낸 것처럼 남자는 숨을 내쉰다
- 계간 『포엠포엠』 2017년 가을호 발표
1966년 경북 김천 출생
대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및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조용한 가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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