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다 /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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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137회 작성일 18-08-03 11:13본문
젖다
마경덕
토란잎 한 장 뒤집어쓰고 달리는데, 빗소리에 먼저 젖는데
왜 토란의 머리는 안 젖지?
도르르 말린 풋손가락, 하나 둘 펼쳐드는 그늘 넓은 여름이네. 손에 풀물 든 그 노인 밭고랑에 쪼그려 알토란을 묻을 때, 빗소리도 함께 심었네. 질척질척 비 냄새를 먹고 자란 널따란 우산잎들, 풀을 뽑던 노인이 그 우산대를 꺾어들고 방죽을 오르는데,
아, 아, 입을 벌리는 목 타는 연못, 목젖 사이 하얀 뿌리 보이네. 평생 흙 파먹던 토련(土蓮)들, 건너편 방죽으로 슬금슬금 발을 뻗어 흙 묻은 맨발을 씻곤 했네.
방죽마을로 시집 간 사촌언니 백련,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내 것, 종일 물구슬을 꿰고 있네. 치마에 담긴 물구슬 또르르 연못으로 쏟아지네. 쉽게 깨지는 물구슬.
입질, 못 말리는 오리의 입질,
백련이 또 치맛자락을 움켜쥐네. 방수복 한 벌 챙겨 입은 오리. 연못의 속주머니를 들추고 다니네. 비 오는데, 내처 오는데 기름칠한 옷을 입고 토란도 백련도 오리도,
기다리던 목소리에 나는 흠뻑 젖는데, 전화 한 통에 천길 물밑으로 갈앉는데,
젖어도 좋을 것들, 도무지 젖지 않네. 토란도 백련도 오리도…
- 《시와 창작》 (2008년 여름호)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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