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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생각 / 최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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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253회 작성일 18-08-14 00:10

본문

뿌리의 생각

 

  최금진

 

 

 

땅 거죽 파보면 어디서 온 것인지

허연 실뿌리들이

무슨 심각한 회의라도 하는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행과 연을 가르면 의미가 그 틈을 찾아 메우듯이

땅속의 어둠과 어둠을 이어

마침내 들판을 점령하려는 꽃과 나무의 계획

 

지난겨울 우리가 몰랐던 사람을 내일도 영원히 모를 수 있다는

끔찍함을 뒤집어쓰고

기진맥진 뿌리가 우리에게 건너왔을 때

손 잡아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그 움켜쥔 손에는 씨앗이 가득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네

참 좋은 시절이 여전히 뿌리들의 것이었네

 

나 섬으로 이사 와서

밤마다 지층을 파내려가 어떤 대륙을 염탐하고 다녔지만

이 섬의 지층은 온통 구멍 숭숭한 동굴로 이어져 있다는 걸 알지 못했네

발견된 동굴의 입구마다 뿌리혹박테리아가 잔뜩 돋은 허연 뿌리들이

동굴을 따라 다른 동굴에 닿고

하나면서 둘인 동굴, 둘이면서 다섯, 일곱, 아흔 개인 동굴이

이미 세상을 반쯤 다 파먹고

씨앗을 발려놓았으니

 

섬을 캐보지 않는 한

밑바닥에 얼마나 많은 암호와 복잡한 회로들이 지나는지

그 비밀 통신망, 그 비밀기지를 너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뿌리가 허옇게 돋아

백 살을 살고도 더 사는 옆집 할아버지는

지난해 부인을 묻고는, 담담하게

손만 내밀면 할멈은 어디서든 곁에 와 뿌리를 내릴 거라 말했다

 

지난겨울 우리는 혼자여서 외로웠지만 언제나 둘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옆으로, 옆으로 뿌리를 뻗어갔던 것이다

섬과 섬이 되어, 따로 또 같이

 

 - 계간 시와 사상2018년 봄호


 

 


충북 제천 출생
199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1년 《창작과비평》신인상
시집『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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