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 이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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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356회 작성일 18-09-28 14:40본문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이기와
그의 속은 공갈처럼 비어 있었다
스프링도 스펀지도 안락을 제공할 그 어떤
소재도 내장돼 있지 않았다
바로크 문양의 유혹으로 겉치장을 했을 뿐
속을 들춰보면 널빤지 하나뿐인 부실한 골격이
내내 그의 영혼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잘 깎인 무르팍에 앉아봐도
그의 가슴에 내 가슴을 합체해봐도
밤마다 몇 시간씩 부둥켜안고 서로를 탐색해봐도
느껴지는 건 킹 사이즈의 허탈함뿐
내 생의 삼분의 일을 고스란히 바치고도
내 고절한 알몸을 통째로 상납하고도
단 한 번도 푹신한 꿈을 대접받지 못했다
날마다 무섭게 쏟아지는 졸음의 세계가 갈망한 건
서로의 시장기를 보충시킬 육체였을 뿐
탄력 있는 정신도 영구적 파트너도 아닌, 오직
깨어날 수 없게 서로를 마취하는 몽상의 침구였을 뿐
그의 관절 하나가 삐걱이기 시작한 것도
그의 몸 중앙이 맥없이 꺼져들고
내 욕망의 척추가 휘어져 고통이 시작된 것도
수면을 위한 단순한 용도가 아닌
그 외에 탁월한 용도로 서로를 탐미하려 했던 것
그렇게 오용하지 않으면 순순히 잠들 수 없는
워낙 속 재질이 부실한 싸구려 마네킹들이었던 것
- 이기와 시집『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하늘호수, 2002)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그녀들 비탈에 서다』
산문집 『시가 있는 풍경』 『비구니 산사 가는 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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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백수님의 댓글
잡다백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인상파 그림처럼 재밌는 시다. 시와 나 사이의 빈틈이 적당해야 낯섬 속의 즐거움도 느끼는 듯 하다. 겉은 화려하고 멀쩡한데 속은 썩어가는 누구들. 킹사이즈의 허탈함 이기려 아둥바둥 살아가는 나의 모습. 가구는 있지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