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말하는 사람 / 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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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47회 작성일 18-10-29 13:46본문
세 번 말하는 사람
오 은
ㅇ는 꼭 세 번씩 말했다 그의 입에서 같은 말이 속사포처럼 작게 세 번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크게
한번 놀랐다 같은 말을 연속해서 듣는 것이 고역이었다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니!
혀가 짧아서, 속사포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단어의 시작과 끝이 토마토나 아시아처럼 같은 음절이
어서 어떤 말은 세 번 말해야 상대가 겨우 알아들었다 불발이 된 단어는 늘 부끄러웠다
김치볶음밥에 어떤 재료를 추가하고 싶으신가요?
피망, 피망, 피망
말할 때 너무 열을 올려서 그런지 세 번째 피망은 피멍처럼 들리기도 했다 놀란 종업원이 조건반사
처럼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덕분에 피망 볶음밥에 가까운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한 번만 말하면 의심스러웠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상대가 말을 제대로 듣긴 했는지 간파할
수 없었다 파열음이나 마찰음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한번 만에 의사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번을 말하면 상대가 의심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꼭 두 번을 말한다고 했다 사기꾼들은 보통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두 번 말하지 투자하세요, 투자하세요 수익이 납니다, 수익이 납니다
과감하게 투자하실 건가요?
수염, 수염, 수염
수익이 나는 걸 기다리느니 수염이 나는 게 빠르겠다고 답하려다 실패했다 웃음이 났는데 참다 보니
눈물이 났다 속사포의 방아쇠는 총알의 일부만 견인할 때가 많았다
세 번씩 말하면 사람들이 집중했다 세 번 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간절한가 봐,
강조하고 싶은가 봐, 각인시키기 위해서인가 봐, 봐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잖아!
세 번째 말할 때 입천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식욕이 돋았다 무조건반사처럼 천장에서 단비 같은
침이 쏟아졌다 ㅇ는 그것을 다시 식도 뒤로 꿀꺽 삼켰다
저녁에는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차장면, 자장면, 짜장면
속사포에서 파찰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창작과 비평》2018년 봄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현대시》등단
시집『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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