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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가 된 사람 / 이성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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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53회 작성일 19-03-06 09:11

본문

번호가 된 사람

 

   이성목

 

 

세상이 나를 부르는 방식이었다네

 

수억만 개의 번호를 거느리고 비가 내린다네

수억만 개를 기억하라고 나뭇잎을 두드린다네

지붕을 두드리고 유리창 두드린다네

 

두드려도 대답할 수가 없다네

이제 나는 나를 모르겠다네 쏟아지는 빗소리

너무 많은 번호에 일어서서 관절은 녹고 귀는 어둡다네

그중에 어떤 호명들은 환청처럼 지나간다네

유리창에 붙어서 미끄러져 내려간다네

시간이 긴 얼룩처럼 미끄러진다네

 

나는 대답할 수 없으므로

수억만 개의 빗소리를 다 맞아야 한다네

나는 빗속에서 소리를 맞으며

물방울에 갇힌 번호를 몇 페이지에 걸쳐 적고 있는데

 

애인은 우산도 쓰지 않고 발랄하게도 나를 떠난다네

수억만 개의 번호를 소름처럼 몸에 달고서

아라비아 상인들의 은전 소리를 찰랑이며 안녕 안녕 떠난다네

 

그제서야 나는 소리에 젖은 옷을 말리며 머리를 털며 생각한다네

으슬으슬 춥지도 않은 번호까지 가버렸군

  

​- 이성목 시집함박눈이라는 슬픔』(달아실, 2019)에서



이성목.jpg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1996자유문학등단

시집으로 뜨거운 뿌리』『노끈『함박눈이라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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