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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서적 / 서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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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9회 작성일 19-04-09 10:09

본문

폐서적

 

   서연우


 

비가 내렸다

빗소리는 도둑고양이처럼 지나갔다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몸뚱어리는 그물 같은 곰팡이 옷을 입고

민트빛 이마에 새겨졌던 이름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남았다

얇디얇은 갈비 짝마다 낡아빠진 활자들은 전설에 잠겨있다

누군가 꾹꾹 눌러쓴 펜 자국들은

여태 숨 죽여 기어 다니는 벌레들의 연명


지금은 하루의 어디쯤일까

나에겐 시간이 멈춰버린 지 오래다

내가 정설이었던 신선한 기억만이

솜안개 의식 속에서 깜박거린다


신문명에 도살당한 것도

노쇠한 정객으로 유배된 것도 아니다

잊혀지기 싫어 몸서리치는 늙은 여자는 더더욱 아니다

살아서 나간다면

추억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한 진열장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래된 타자기와

백 년 전쯤 인물의 전기 옆이면 좋겠다

그들의 손가락에 닳아 남은 형체는

나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을 것이다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눈을 감고

민트빛 꽃 속에

가물거리는 의식을 맡긴다


-서연우 시집 빗소리가 길고양이처럼 지나간다(천년의시작, 2019)에서

 

 


 

서연우시인.jpg

   

경남 창원 출생

2012시사사로 등단

시집 라그랑주 포인트빗소리가 길고양이처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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