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에서 /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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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91회 작성일 19-04-12 09:35본문
도랑에서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김소월 〈개여울〉
신해욱
이쪽을 등지고
검은 머리가 도랑에 쪼그려 앉아 있습니다.
산발입니다.
죽은 생각을 물에 개어
경단을 빚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그랗고
작고
가차 없는 것들.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당돌한 것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피가루 콩가루
비듬가루
뇌하수체가루
녹두가루
알록달록한 고물이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 나눠 먹읍시다.
바람이 붑니다.
검은 머리는 뒤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검은 머리만 어깨 너머로 흘러내립니다.
이크, 몇 오라기가
경단에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쟁반을 몰래 내려놓고
머리를 땋아주는 일이 먼저인 것 같습니다.
검은 머리가 삼손의 백발이 될 때까지
백발마녀가 라푼젤로 환생할 때까지
그 다음엔
그 다음엔 꼭 나눠 먹읍시다.
어제의 네가
오늘을 차지하고 있어서
오늘의 나는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심》2015년 8월호
1974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한림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간결한 배치』 『생물성』 『SYZYGY』
에세이 『일인용 책』 『비성년열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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