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잃어버리다 /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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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854회 작성일 19-04-26 14:41본문
우산을 잃어버리다
김기택
버스에 오르자마자 우산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우산은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가
남의 바지를 두어 번 슬쩍 적셨다가
좌석에 잠깐 기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구두들에게 밟혔다가
슬픈 눈이 잠시 헛것에 초점을 맞추는 사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슬며시 없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산을 찾았으나
우산은 제자리를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잃어버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우산은 민첩하게 제 길을 찾아냈다.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
스스로 찾아낸 자리를 영영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렸으므로 나는 다시 우산이 필요했다.
비가 더 많이 내렸으므로 잃어버릴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떨어진 꽃잎들은 껌처럼 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우산들은 어떻게 공기 속에서 비의 냄새를 찾아내어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펴지는 것일까.
눈물은 어떻게 슬픔이 지나가는 복잡한 길을 다 읽어두었다가
슬픔이 터지는 순간 정확하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저 많은 꽃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봄과 나뭇가지에 마련된 자리에 찾아와 한꺼번에 터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면 저 많은 우산들은
어떻게 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리를 찾아 일시에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흙바닥에 뒤엉켜 있는 꽃잎들은
어떻게 한 치의 오차없이 저자리를 찾아낸 것일까.
슬픔이 흘러나오던 자리는 어떻게 감쪽같이 명랑해지는 것일까.
비가 그치자마자 저 많은 손들은
어떻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완벽하게 잊어버리는 것일까.
내 손에 우산이 없는 걸 보고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었다.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
『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울음소리만 놔두고 개는 어디로 갔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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