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 혹은 식후 / 신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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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33회 작성일 19-05-30 09:38본문
식전 혹은 식후
신용목
빠르게 앞서 걷다가 갑자기 휙 돌아보았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뒤집히듯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너는 말했다. 등 뒤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타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그림 속 창문을 하나하나 셀 수 있는 것처럼 네 목소리를 다 셀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어차피 세상은 망할 건데, 뭔가 고장 나고 오염되고 부딪혀서 망하는 게 아니라 아름답지 않아서 망할 건데,
나는 우리의 유쾌함과
기쁨과
사랑이 그것을 유예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어.
라고 말할 때,
나는
양 한 마리와 양 두 마리와 양 예순일곱 마리쯤에서 사라지는 불빛처럼,
네 목소리 속에서 사라질 것 같다.
머릿속이 끓고 있으면 무엇을 넣으면 좋을까? 그림 속 창문이 물감을 끓이고 있듯이
그리고,
미역국에서 멸치를 건져내며 머리에서 생각을 건져내는 방법을 생각했다.
생각은 오래된 거지만,
여전히 뜨겁다.
모든 비법이 불 속에 있다는 말은 꼭 사랑에 대한 비유 같다고, 뒤집히는 고기 옆에서 졸아드는 국물 같다고,
누군가 내 머릿속을 부드럽게 저으며
농담을 건넨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19년 봄호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등
제19회 백석문학상, 제18회 현대시작품상, 제14회 노작문학상
제2회 시작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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