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그림처럼 / 정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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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1,042회 작성일 19-06-25 09:32본문
장욱진의 그림처럼
정재분
그녀의 이름이 뭐든 상관없었어
라디오 볼륨은 충분했지만 귀담아 두지 않았어
16년간 택시기사 경력을 씩씩하게 자랑할 때도
먹물이 함초롬히 적셔지지 않은
붓의 갈기털이 들쭉날쭉한 목소리라는 느낌이 전부였지
내 인생의 음악이 패티 김의 이별이라고 했을 때
신파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몇 해 전에 남편이 저 세상으로 가버렸대서
이별과 죽음의 지독한 유사성을 되짚으며 후딱 철회했지
“우리 막내가 곧 결혼한”다기에 청취자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마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여보 좋은 걸 혼자만 보게 돼서 미안해…… 그치만 나 잘했지”
나 잘했지의 ‘지’자가 비눗방울처럼 맑게 떠다녔지
잠자리의 머뭇거림처럼 슬픔이 그녀의 목소리에 앉으려다 날아갔어
무구한 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노장의 화가가 마침내 도달한 추상의 경지처럼
힘들고 외롭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원망 한 올 없이 마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여보 나 잘 했지! 우리 만날 때까지 잘 있어 나도 잘 있으께”
만날 곳이 함께 갔던 카페라도 되는 양이어서
바람결이 되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만 싶은데
그녀의 이름이 뭐랬더라 잘 들어 둘 걸
현자 씨라고 그랬든가
—《시산맥》 2011년 봄호
2005년 계간《시안》등단
시집으로 『그대를 듣는다』
산문집『침묵을 엿듣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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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깊으면멋님의 댓글
맛이깊으면멋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라디오에서 나온 16년 경력의 택시 여자 기사님 사연을 듣고
정재분, 《시산맥》 2011년 봄호
16년간 기사 생활의 이력을 말할 때도, 애창곡이 패티김의 이별이라 할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치부해 버렸는데, 몇 년 전 사별한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부터는 귀가 트인다.
막내 시집 보낸다는 얘기를 전하며 잘했지라는 물음에, 연이어 만나자는 말.
이름을 잘 듣지 못했다는 게 아쉬워 진다.
라디오 청취자 코너에 나오는 세상사는 일견 그렇고 그런 빤한 얘기들이라 넘기기 쉬운 우리들의, 나와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다 하나하나에 각자의 이력과 역사와 사연이 가슴 찡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라디오 사연이 주는 감동은 크지 않아서 좋다.
위대한 인물이 보여주는 범세계적일 정도의 거창한 규모의 이야기는 감흥이 적다.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동도 적다.
하잘 것 같아 보이는, 하루가 힘들고 고된 나의 생활과 삶에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것은, 바로 나와 같이 어렵게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장욱진은 서양 화가.
문외한인 나는 처음 듣는 이름.
네이버를 통해 소개된 그의 그림을 살펴보니, 가족과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특히, 나무 위에는 집, 혹은 사람들이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이중섭이 보이기도 하는 듯하고.
아마도 시인께서는 장 화백의 그림에서 라디오 사연과 같은 감동을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2019.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