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 구효경 > 오늘의 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오늘의 시

  • HOME
  • 문학가 산책
  • 오늘의 시

 (관리자 전용)

☞ 舊. 테마별 시모음  ☞ 舊. 좋은시
 
☞ 여기에 등록된 시는 작가의 동의를 받아서 올리고 있습니다(또는 시마을내에 발표된 시)
☞ 모든 저작권은 해당 작가에게 있으며,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 구효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407회 작성일 19-09-16 09:41

본문

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구효경

다루기 힘든 약대처럼 발굽으로 밀어내고 싶은 책들을 밀어낸다.

고전의 역사서를 서가 뒤쪽에 처박으면 고전시대가 구석지로 밀려나는 것 같고

낭만파의 화집을 다락방에 감추면 낭만주의시대가 어둔 뒤안길로 암전해가는 것 같다.

책상과 손바닥에 놓인 종이의 혁명이 세계를 싣고나가는 트럭이 된다면

월세 방을 옮기며 이삿짐에 고물상으로 실어 보낸 책들로 인해

오늘날의 모든 시대는 종말을 맞을 것.

팔이 무한한 안으로 굽는 시대.

혼자 비좁은 바깥으로 뻗어가는 괴물의 팔 같은 방 한 칸에서

요절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진부한 노래를 불렀다, 불렀다, 불렀다.

덧없는 노력을 쏟았다.

지난 달 제출한 이력서는 줄줄이 퇴짜를 맞았고,

팔목엔 푸른 피와 냄새로 밴 수음의 흔적들이 선연하다.

염통을 과녁으로 들고선 저녁, 제 팔자에 적합한 비난의 화살이 穴을 관통했다

 

너와 내가 공유한 구멍 속으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고, 비로 습작의 음표들을 잇댄다.

 

시를 모르는 여인아, 나는 너의 심장보다 염통을 더 사랑한다.

이미 관통당한 피를 줄줄 흘려보내며

사라진 악사들을 몸 안에서 빼내오는 흑기사가 되려는지.

기사도의 정신은 죽었고, 너의 염통마저 결핵에 옮기 전 어서 내 몸에서 도망치길 바랄게.

혼자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교실, 하프시코드와 쳄발로가 죽은 묵상을 연주하는 복도,

요컨대 그 자리에서 너는 말 없는 얼치기 가수다

어눌한 언변 대신 폐활량 높은 단조의 음을 뱉어 대화를 걸어오지

너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싶었다고 했지만 과거형의 발언은 이미 네가 죽은 사람이며,

그 광경이 아름답지 못했다는 치부의 고백 같았지

 

창문을 열며, 이런 날의 쇼팽 에튀드는 축축한 느낌이야, 이별의 곡도 추격도 꺼내지마.

버려진 피아노가 죽었을까……

벙어리 소프라노와 나이 어린 카운터테너는 반주 없이 대화할 수 있을까.

사실은 정작 궁금한 건 푸른 노트를 버린 자리에 피어날 곰팡이의 안부였다.

사라져야할 것은 반주나 말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있었는데, 왜 버벅거리고 있는 거지.

휴지통에 구겨 넣은 사직서처럼 몇 번씩 돌출했다가도 폐기되는 지겨운 그림자들,

발에서 떼어내어 서가 창고에 가둔다.

나 없이 그림자만 책들을 먹고 잠들며 책들을 찢으며 자라길. 피아노의 시인이여.

유일하게 남겨놓은 시대의 유언장처럼 마지막 역설을 토해낸다.

절대로 독서 따위는 하지 마.

길은 책 밖에 있어 비상구도 탈출구도 절대 책 안에 존재하진 않지.

늙은 영감처럼 쉰 소리를 거창하게 씹어대면서도 민망한 줄을 몰라

젊은 날 유기했던 콘스탄티아라가 뛰어나와 눅눅히 젖은 노트를 뒤적일 때

거미의 입에서 나온 실뿌리 같은 침을 뱉는다.

벙어리 가수 흉내에 익숙한 푸른색이 점철한다.

 

나이만큼 쌓인 악보들, 우울에 대한 짤막한 단상, 실어증과 폭언증 사이의 틈새,

문턱을 굴러다니는 활자들, 비로 쓸어내린다.


- 2014시인광장》 당선작





구효경 프로필 사진.jpg


1987년 전남 화순 출생

2014시인광장신인상으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665건 1 페이지
오늘의 시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추천 날짜
1665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7 1 03-27
1664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 1 03-27
1663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0 1 03-27
1662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9 1 03-27
1661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3 0 03-27
1660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4 2 03-13
1659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0 1 03-13
1658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7 1 03-13
1657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8 1 03-13
1656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4 1 03-11
1655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 2 03-11
1654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7 1 03-11
1653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6 3 03-11
1652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6 1 03-08
1651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6 1 03-08
1650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 1 03-08
1649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 1 03-08
1648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0 1 03-08
1647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58 1 02-12
1646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60 1 02-12
1645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92 1 02-12
1644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13 1 02-12
1643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94 1 02-07
1642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8 1 02-07
1641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8 1 02-07
1640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2 2 02-07
1639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9 1 02-07
1638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24 1 01-23
1637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57 2 01-23
1636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900 1 01-23
1635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809 1 01-23
1634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61 2 01-07
1633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7 2 01-07
1632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68 2 01-07
1631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13 1 12-26
1630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09 1 12-26
1629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47 1 12-26
1628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95 3 12-20
1627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68 2 12-20
1626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92 2 12-20
1625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44 2 12-14
1624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25 2 12-14
1623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46 3 12-14
1622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82 3 12-06
1621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64 2 12-06
1620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37 2 12-06
1619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77 2 11-16
1618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03 2 11-16
1617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927 2 11-16
1616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92 2 11-09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gmail.com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