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 장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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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32회 작성일 19-09-25 10:23본문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장종권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껍질을 벗고
산 것들은 생명의 소중한 속살을 파내어
우주의 먼지 속으로 모조리 던져버려라
보이는 것으로 보았다 말할 수 없고
들은 것으로 들었다 말할 수도 없는
미래의 꿈들이 절망적으로 춤추는 곳에서
꽃은 꽃으로 서 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다
아름답게 피어도 더 이상 피었다 말할 수 없다
미치도록 좋았던 그대에게 묻노니 지금도 황홀한가
흘러간 자리에도 꽃은 피지만 피었다 말할 수 없다
피어도 피었다 할 수 없으니 이제 꽃은 꽃이 아니다
사라진 들에 바람은 불어서 어쩌자는 것이냐
얼굴 없는 종족들에게 향기는 날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사라진 것들의 무덤 위로 거대한 꿈의 궁전은 무성하게 자라고
얼굴 없는 존재들은 밤이나 낮이나 클릭, 클릭, 클릭,
혼자서도 섹스를 한다
드디어 머리 아픈 한밤 엮어내는 상상의 세계가 만병을 통치한다
심장을 광대한 허공 속에 띄워놓고
맛없는 땀과 식은 피를 뿌려대는
이 저녁 어둠은 빛처럼 황홀한 그림 그리며 다가서고 있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살아야 할 이유 있어도 굳이 목을 꺾어버려라
슬퍼하는 이 없어 죽어도 결코 죽음답지 못하리라
―지평선동인집 『소나기가 두들긴 달빛』(리토피아, 2015)에서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198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아산호 가는 길』 『꽃이 그냥 꽃인 날에』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호박꽃 나라』
장편소설 『순애』 창작집 『자장암의 금개구리』 등
2000년 인천문학상, 2005년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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