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 선잠 /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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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86회 작성일 20-03-02 10:13본문
홀연, 선잠
김정수
나는 매번 목만 살아 있어요
목 아래 몸은 암매장 당했어요
목각인형도 없는 침대에서 고양이가 분홍 책을 반복해 읽어요 길들여지지 않은 가구들이 나를 쏘아봐요 거울 뒷면으로
낯선 불의 통증 몰려와요
점차 목 위로 차오르는 갈증
발가락을 움직이는데 생의 절반을 써야만 하다니
불면의 접시 위에서 누군가 삽질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난 잘 살고 있어요 악몽이라니요 악몽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눈알 같은 거잖아요 몇 그램의 의식이 잠시 멈춘 사이 의심이 목젖을 흔들어요
분홍에서 빨강까지
도착하지 않은 새벽이 장롱과 거울을 흔들어 깨우면
음악도 연민도 없는 피아노가 가위처럼 일어나요
오, 내가 죽은 건가요
오드아이, 침대 위에서 책을 읽고 있던 고양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요 옷장이 거울을 나서는 동안 눈과 눈 사이가 멀어져요
맙소사, 저게 내가 낳은 아이라니
곧 사라질 빛이 입을 틀어막아요
왼발이 오른쪽으로 까닥까닥 돌아누워요
⸺계간 《포지션》 2019년 봄호
1963년 경기도 안성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등
2013년 한국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제28회 경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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