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 / 이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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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169회 작성일 20-03-03 16:15본문
매혹
이성렬
꽃들은 그의 손길을 반기지 않았다
스쳐가는 고독한 등을 사랑했을 뿐 그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애인을 바꾸고 묵은 식성과 가구들을 모두 버리는 등
어느 해 겨울에는 자작나무와 보드카를 실어 나르던
해변 철로의 흔적을 찾으려 북해를 떠돌다가
한동안 군산 경암동의 철길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인물
몇십 년 동안 수많은 남의 사진 속에 배경으로만 남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해변의 사내를 선망했다
그는 섬나라의 외딴 포구로 귀항하는 밤배들 사이로
왁자지껄한 송년 파티를 듣고 있다
현의 애절한 떨림과 함께 간간이 환성이 터져 나오는
12월의 연찬에 초대받지 않았으니 누구도
그의 노래로부터 마이크를 거두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어서 행복하다
아침이면 마을의 노파들이 오징어를 구워파는
가판대에 앉아 그는 좌중의 어느 누군가
몸속으로 흘리는 눈물의 명암과 가슴을 가로지르는
혈액의 점도를 가늠하여 꽤 오랫동안 드나들던
남의 잔치에서 한 줌의 목소리를 남기려 했음을
몹시 저어하며 이제는 작별의 인사도 없이
표표히 그 음습한 장을 떠날 결심에 발목을 데우며
강물 위로 옛집이 둥둥 떠내려가는 꿈과
봄날의 빗방울들을 불 지르는 백일몽
지하철 탑승구의 노란 선 밖에 서 있는 여자와
돌연 사랑에 빠지는 긴 몽상에 다시 설레며
―계간 《시산맥》 2020년 봄호에서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및 KAIST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
2002년 《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여행지에서 얻은 몇 개의 단서』 『비밀요원』 『밀회』 등
산문집 『겹눈』
제1회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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