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운명 /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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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16회 작성일 20-06-19 12:52본문
숨은 운명
천수호
아무리 더 가지려 해도
창(窓)은 단호하게 “거기까지!” 네 음절의 칼날로 내리친다
칼끝과 칼끝이 부딪치며 멈춘
냉철한 선(線)의 세계
더 가질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니까
틀이 깨질 때까지 수건을 절반으로 접는 연습을 했다
저곳은 유연해
허리를 쉽게 휘는 것들은 창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
‘묘안’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눈동자가 봉분 같은 고양이가
물어뜯을 것이 있는 쪽으로 허리를 휘는 장면처럼
매미소리가 내 몸을 아무 곳이나 뚫으면서 애벌레 걸음으로 왔다가 간다
내게 저렇게 왔다 가는 것들
창을 건드리지 않으면 도저히 담장을 넘을 수 없는 것들
창을 내다보다가
순간이라는 말이
화면을 닫았다가 열면서 검은 새떼를 쫓는 장면을 목격한다
오늘의 창은 여기까지!
선을 자르는 칼날 연습 중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진 몇 마리 하루살이의 율동으로
맨발은 더 걸어 나갈 수가 없다
창을 깨고 맨발이 피를 흘린다
아무리 더 가지지 않으려 해도 운명은 숨어서
바깥 날씨를 마음껏 저장하고 있다
⸻계간 《시와 사람》 2020년 봄호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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