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 / 이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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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87회 작성일 20-09-22 15:32본문
문병
이명윤
엑스레이에 구름 낀 하늘이 찍힙니다,
어제 아팠던 내가
오늘 아픈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서로의 병명을 묻느라 이번 생은 다 소비하고 말 것 같습니다
병동을 들어서면 늘 벌거벗은 기분이 들지요
내 몸 구석구석 스캔하는 환한 불빛들, 가끔씩 숨을 멎고
눈을 깜박거려야 넘어가는 화면들
복도엔 오늘도 역시 알 수 없는 냄새들이 흐르고요 마스크로 가렸지만
눈빛을 숨길 수 없는, 질문들
신이 우리를 통제하는 지루하고 오래된 방식을 알고 있습니다
웃음은 어느 공사장 난간에서 골절되었다는군요
고요한 병동은 시간이 고여 있는 노란 연못 같습니다
당신은 누워 링거만 보고
우리는 서서 당신을 봅니다
아프지 말고* 살아가는 일, 이 세상에 없는 문장을 위하여
어제 아팠던 내가 오늘 아픈 당신을 위로하러 왔습니다
이것은 계절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연대
병실 문을 나설 때까지
그늘진 침대에서 돌아누워 있는 등을 봅니다
바위처럼 아픈 것입니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숲속에 혼자 있는 것입니다
* 자이언티(Zion. T)의 노래 〈양화대교〉에 나오는 가사 ‘아프지 말고’
-⸺시집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2020년 8월)
2007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시마을 문학상>, <전태일 문학상>
<수주 문학상>,<민들레 문학상>, <솟대문학상> 수상
<추천글>
이명윤은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마치 수제비를 뜨듯 일상의 한 부분을 뚝뚝 떼어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소외되고 그늘진 존재들을 어루만질 때에도 감정을 억누른 채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럼에도 시를 다 읽고 나면 가슴이 아려올 때가 많다. 그가 그려낸 사물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인물들은 생생하게 육박해 온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분명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했을 뿐인데 가슴속에선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그의 담담한 진술 속엔 억누르는 슬픔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여백과 잔상과 울림이 있다.
― 오봉옥(시인·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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