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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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91회 작성일 20-11-30 13:32본문
연분홍 유언이 있었다
천수호
노래만 남기고 꽃잎은 가져간 사람이 있다
투병은 길었다
만개하기 전에 꽃잎이 먼저 부스러져서
그는 잘 보지 않는 책갈피를 열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핏기도 핏물도 없는 페이지에 잘 찍은 발자국처럼
꽃잎 가랑이를 찢어도 보았구나
그래, 당신이었어!
언젠가 그를 그렇게 열어볼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그는 더 먼 곳에 있겠다고 했으니
꽃잎은 병색도 모르고 그를 따라갔고
물기가 빠져나간 페이지에
이야기들만 남아 개미처럼 기어다니겠지
한 페이지 넘기고 듣고
한 페이지 넘기며 따라 부르고
그런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납작해진
꽃잎을 간혹 건드려 깨워야지
딱풀처럼 잘 붙은 사랑 얘기는 다시 열지 말까?
오래 덮어둔 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날이 올 테니까
꽃잎만 남기고 노래를 가져간 사람이 있다고
가물거리며 말할지도 몰라
그런데 참 이상하지?
노래와 꽃잎 이야기가 서로 나뉠 수 있다는 것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글자들을 암호 삼아
남이 읽지도 듣지도 못하게 밀봉해둔 유언이 있다는 것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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