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이전에 짖음 / 이장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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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63회 작성일 21-02-15 17:28본문
개 이전에 짖음
이장욱
이 산책로는 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해. 다정한 편백나무들, 그림자들, 박쥐들
가지 않은 길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어요?
이런 길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도 헤어지는 법이죠.
어제는 죽은 사람과 함께 걸어갔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처럼 그이가 나의 팔짱을 끼었는데
내 팔이 스르르
녹아갔는데
기억하나요? 여기서 우리는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었잖아요. 보자기라니 우스워. 식빵에 잼을 발라 먹었죠. 오래 전에 죽은 강아지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는데
대낮이고 사방이 캄캄하고 별도 없이 친근한 길이었다. 길을 잃는 것이 익숙한 길이었다. 누구나 이미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왈왈,
짖고 싶은 기분이었다가
아마도 나는 미래의 당신의 오후의 조용한 기억 속에 담긴
잼 같은 것인가 봐요.
끈적끈적 흘러내리나요.
달콤한가요.
강아지 한 마리가 왈왈,
짖으며 따라왔다.
저것은 개이기 이전에 짖음 같구나.
우리는 검고 맑은 하늘을 향해 일제히 입을 벌렸다.
우리는 편백나무들 사이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 녹아버린 한쪽 팔을 흔들며 안녕,
하고 인사를
당신은 곧 나와는 다른 기억을 가져요. 그것이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산책이기 이전에 걸음, 새벽이기 이전에 불안이니까요.
잘 구워진 빵에 빨간 잼을 발라서 꼭꼭 씹어 먹어요. 맛이 있지 않나요? 맛이? 정말 맛이 있어서
그게 슬퍼서
당신의 얼굴이 다 녹아버렸어요.
나의 생각은 지금 너무 뜨거워.
빨갛고 달콤한 잼이 된 것 같아요.
끈적끈적 흘러내리고 있어요.
ㅡ 계간 《발견》 2020년 겨울호
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 노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잠 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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