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 박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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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75회 작성일 21-05-21 20:49본문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박판식
여자는 나무 꼬치로 은행 알을 꿰고 있다
과도로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랫밸르 찔렀다는
기사가 거실바닥에
깔려있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앞자리의 급우를 지독하게도 괴롭혔던 H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양계장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무슨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를 줄 알았다
어둠의 세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보스가 될 줄 알았다
오늘 나는 흑인 혼혈아가 되어 있는 꿈을 꾸었다
백인이 너무 되고 싶어서 한참을 울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나를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바람이 분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라
이런 날은 하늘을 쳐다보지 마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울고 있다
파란 하늘이, 눈물마저 마른 사람이 울고 있다
너는 보겠지, 옥상의 포대기 속에서
땅속에 ⊂자로 세워진 정화조 속에서
혼자 방치된 안방에서
일산대교 아래에서
장기말에 치여 세상 밖으로 떨어진
어떤 방심한 파란색의 장기말을
생활은 어떻게 그 안에 불안과 외로움을 품고 있는가
오늘은 까마귀들이 옥상 텃밭의 상추 씨앗을 다 파먹었다
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들이 마차와 말로 보인다
나도 안다, 내가 중세인이라는 것을
하지만 세상이 이미 악의 손에 떨어져 있다면
이런 식으로 굴러갈 리도 없을 테지
그 정도는 어리석은 나도 짐작하고 있다
세상에 신을 배신할 용기를 지닌 자가 어디에 있으랴
신을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
뭔가가 지금 나를 알뜰살뜰 꿰고 있다
티브이는 현재 발리에서 생긴 일을 재방송 중이다
진지하게 그것을 보고 있으면
괴롭고 슬퍼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
드라마는 되도록 더 허황되며 상투적이고 과장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날마다 잊어버려야 한다
뭔가 좋은 것이 그 안에 약간은 담겨 있었다 해도
―월간 《현대시》 2021년 4월호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밤의 피치카토』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산문집 『날개 돋친 말』
2014년 김춘수시문학상, 통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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