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구로 내려가는 나무 / 황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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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27회 작성일 21-06-08 20:19본문
분화구로 내려가는 나무
황학주
산 아래서 위로 나무가 야생한 거리를 잴 수 없으나
혼자 괴롭게 걸은 뒤
끝이 난 길에 맺혔다
구상나무는 잎 속에 기름이 많아 그렇게 잘 젖지 않고
날지 못하는 새도 어디론가 제대로 가고 있다
빙설을 하얗게 쓴 나무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잎에서 향기가 나고 수관은 부서지지 않았다
이곳이 뷰포인트인 까닭은
여행객들의 상상이 미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죽은 돌로 취급받는 화산 송이들을 끌어안고
길은 어디에서 술을 배우고 봄의 판본을 읽었는지
밑으로
안으로
구불거린다
창백하고 외로운 공기가 작물로 사는
분화구는 높낮이를 기르지 않으며
비렁뱅이 같은 마른 풀잎들도 높낮이로 끼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가까이 있다
큰 구상나무가 밀어 넣은 작은 구상나무처럼 시작했으나
나는 여기서 내가 된 것 같다
누군가는 잘못 알고 들어온 적이 있겠지만
사방 천지가 심심하다는 게 나만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저것 소홀한 듯 받아 담은 분화구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으며
텅, 텅 비었다는 소리도 내지 않고
옛날 얘기 같은 것을 싫어하는 나도 그냥 가게 둔다
그러나 젓봇대에 올라간 사람처럼
예민하게 분화구에 내려온 정신도 있으니
누구나 실천의 절반을 오르는 데에 쓰고 절반을 내려가는 데에 쓴다 해도
내 정신의 푸른 초록을 모아놓은 곳은 저 발밑이다
내가 본 세상은 본 그대로 나와 함께 가며
밑으로
안으로
구불거린다
한 잎 한 잎 시간이
한 잎 한 잎 시간이 마구 지고
새긴 것을 되새기는 내 영혼은
고통스럽게 천천히 가는 구상나무 육체를 하고
내가 사는 곳에서
오로지 자신을 흰 눈에 양껏 쓰고 있다
이 순간 내리는 족족 흰 눈 맞는 데 나를 쓸 수 있다
흰 눈이 앉았다 간 자리엔 또 마른 염분이 남아 구르고 구르겠지만
한 인생이 던진 차운 질문은 물보라를 날리며 타구로 날아가
짧은 봄 어느 돌밭에 풀씨를 흘리기도 하리
배척하지도 배척되지도 않는 알 수 없는 정체들로 구성된 시간은
바람 속에 휘파람새 소리를 내며
더 내려가려는 것처럼
더 안 보이려는 것처럼
흘러간다
저 위에서는 이 아래를 보고 있다
차라리 나의 모형이여
분화구는 분화구 속에 누운 공간을 본뜬 거 아니냐
나는 늙고 아프다
반세기가 반세기보다 더 많은 죄를 부풀리고
격정은 몰래 그 돌들을 들어 나르고
어이없는 생의 장면을 낳을 듯 아픈 배를 만지며
때론 애타게 밑에서 기다렸다
그때 사랑한다고 정말 귀를 잘랐나
매일 죽고 싶은 짓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혀를 깨물었나
그걸 또 말하지 않으려
분화구는 제 머리를 목 안으로 함뿍 눌러 넣어 생긴 것이고
분화구에 뒹구는 물무늬는 그 후에 생긴 눈물겨운 음반일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해
부상하려고만 하는 세계의
위에서 아래까지 다 깨지는 삶의 동선은
아직 깊고 멀다
저쪽은 독하다
영혼으로 치면
보다 캄캄하다
―계간 《불교문예》 2021년 여름호
1954년 광주광역시 출생
1987년 시집『사람』으로 등단
시집 『내가 드디어 하나님보다』『갈 수 없는 쓸쓸한』
『늦게 가는 것으로 길을 삼는다』『너무나 얇은 생의 담요』
『루시』『저녁의 연인들』『노랑꼬리 연』』『某月某日의 별자리』
『사랑할 때와 죽을 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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