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립 미술관 / 한정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65회 작성일 21-08-02 23:08본문
시립 미술관
한정원
엘리베이터는 밖에 세워 둘 것
본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1,800년대로 들어가야 하니까
나의 이집트를 지나
아몬드나무를 건너가며
뜨거운 빗방울을 맞아야 하니까
당신은 1,800년대에 태어나지 그랬어요
천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열 개의 암실
환한 지붕 아래서는 과거를 볼 수 없어
조도는 낮게 배치할 것
어둠이 뿜어내는 19세기의 별빛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깊이이니까
붉은 방석에 앉아
한 시간 동안 무릎 꿇고 울어야 했던 여름이
빛을 녹채錄彩할 수 있다면
나는 검은 기둥 뒤에 숨어 갈색 피부를 이식할 거야
전시실 가운데는 토마토 스프를 먹을 수 있는
하얀 테이블의 카페를 열어 놓을 것
오래된 접시에 입을 맞추고
호퍼가 남기고 간 이른 일요일 아침을
수직의 구도로 기다려 보는 일
미술관을 다섯 번 접었다 펼치며
한숨 자다 일어난 남자가
푸른 수염을 깎으며
이백 년 전의 얼굴로 말한다
미래는 미래처럼 보이지 않고
과거는 미래처럼 보인다고
건물 뒤 자동으로 폐쇄된 출입구 아래는
발목을 담글 수 있는 물의 책갈피를 끼워 넣을 것
미술관은 늙어 갈수록 목이 마르니까
물이 투영하고 있는 또 하나의 별관을 지어야 하니까
―한정원 시집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시작, 2021)
1955년 서울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교와 세종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
『마마 아프리카』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 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