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쓸 연애 / 이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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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014회 작성일 21-08-09 22:40본문
몹쓸 연애
이은유
무작정 달려가고 싶은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 때나 그를 향해 마구 마구 치달았으면 좋겠다
책을 읽다가 책장을 덮어 팽개쳐버리거나
꾸역꾸역 밥을 먹다가 밥숟가락을 내던지고
느닷없이 차를 몰고 가거나 밤기차를 타고 가
자고 있는 그를 불러내 대책 없이 매달리고 싶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나를 맞이한
부스스한 머리 모양을 하고
집에서 입고 있던 허름한 옷을 그대로 입고 나와
눈곱을 떼어내려고 눈을 비비대는 그를 보고 실망도 하겠지
내 마음엔 얼마나 많은 허공이 둥둥 떠다니는지 참혹하게 느끼겠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전화를 받던
갈라진 목소리가 떠올라 몸서리도 쳐지겠지
피다 만 담배를 구겨 꺼버리듯 미련 없이 돌아서 가겠지만
그는 다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기를
열정이 바닥나 맨발로 그가 찾아온대도 나는 그저 시큰둥하겠지
그렇더라도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금기의 마약 같은 허밍의 불씨를 지필 수 있다면
맑은 날에도 바람에서 나는 비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겠지
불현듯,
―이은유 시집 『태양의 애인』 (시인동네, 2015)
1968년 경기도 안성출생
1990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로 등단
『이른 아침 사과는 발작을 일으킨다』 『태양의 애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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