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백을 접으며 / 안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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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939회 작성일 21-09-04 14:56본문
종이백을 접으며
안명옥
전생이 나무였던 나에게 산소 같은 존재라 했던
당신 앞에 꿈을 꾸듯 펼쳐있다
당신 생각대로 재단을 할 것이다
잘못 다루면 손을 베이기도 하거나
관계가 찢어져 버리기도 하지
당신을 끌어안으려고 길어진 내 두 팔을 잘라내고
이리 접고 저리 접고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당신 손길에 순해지면서
형태가 만들어지고 쓸 만한 작품이 되려는 때에
종이가 바랬어
묵은 시간을 호출하듯 재단하면서 각을 만드는 말
칼선을 내던 두툼한 손을 멈추고 담배 한 대 피우는 동안
새로운 종이가 들어오자 나를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다시 순백의 설렘을 펼쳐놓고
남은 시간을 함께 가고 싶다고 쓰다듬는 눈동자
무심 쪽으로 밀려난다는 것,
약해진다는 것은 슬픈 일만은 아니고
자유를 얻는 일인 것 같아서
타공 후 끈을 넣으면 완성되는
종이백 한 장의 나는 밀려난 구석, 거울 앞에서
더 접힐 것 같지 않은 날들,
당신이 재단하던 것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을 나선다
―계간 《시산맥》 2021년 가을호
경기 화성 출생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서사시집 『소서노』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시집 『칼』 『뜨거운 자작나무 숲』
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등
성균문학상 우수상, 바움문학상 작품상,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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