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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수복 / 한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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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05회 작성일 21-11-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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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수복

 

 한우진 

 


한잔


눈이 내리고 펄펄 나는 기차를 탔다

나라 지킨다고, 나라가 시킨다고 줄서서 머리를 밀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눈송이 어린 것들은

의무실 창 밖에서 손을 비볐다 군복에 때가 끼고 알약이 쏟아졌다

마분지에다 편지를 썼다 찢어진 아리랑이나 명랑잡지를 들췄다

되돌아오기만 하던 편지 사이로 연필가루가 날렸다

위문편지가 도착하고 보급창고에서 동기 한 명이 쥐약을 먹었다

위문편지는 한결같이 우리들을 씩씩하다고 눈이 올수록 씩씩하다고 부추겼다

나는 반공도덕책 속으로 들어가 총을 내려놓고 연병장을 돌았다

눈이 그치고 국군아저씨! 뒤에서 불렀지만 나는 절뚝거렸다


아저씨,아저씨

멀리서는 씩씩하다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두잔


강바닥은 마르고 쫄쫄 나는 위경련을 앓았다

돌멩이 화전이 싫어 겔포스 같은 구름만 들이켰다

수수밭을 들락거리며 신물을 토했다 우수수 먼지뿐인 빚뿐인

늦콩을 털었다 지붕에선 밤새 고추가 모가지에 이슬을 받았다

기차가 지나갔지만 결행은 못하고 진땀만 흘렸다

들머리가 추워지자 느릿느릿 관광버스는 트림을 해대며 신작로를 지나갔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스피커는 단풍들고 그러다가 지쳤다

스피커는 한결같이 우리들을 아름답다고 놀이 번질수록 아름답다고 직직거렸다

나는 군청게시판 안에서 삐딱하게 모자를 쓰고 낫을 들었다

어이 새마을지도자! 읍내에서 나는 진종일 비틀거렸다


새마을, 새마을

멀리서는 아름답다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석잔


비가 오고 나는 용산역에서 엎어졌다

꿈꾸는 볼펜으로 이력서를 쓰고 목장갑을 꼈다

야근은 두꺼운 책과 같았다 쇠로 된 책-넘기다가

밀링머신이 손가락을 먹어치운 날은 유행가를 듣는 게 슬펐다

배호를 따라 부르면 식당의 나무젓가락도 소름이 돋았다

조간신문에 낀 전단지가 석유를 먹는 것처럼 술을 마셨다

포마드를 바른 시찰단이 오는 날은 풀을 뽑고 휘파람을 불었다

시찰단은 한결같이 우리들을 희망이라고 오줌보가 탱탱할수록 희망이라고 얼렀다

나는 조국근대화 플래카드 앞에서 연장을 차고 사진을 찍었다

비가 그치고 헤이 산업의 역군! 해는 빛났지만 나는 푸석거렸다


근대화, 근대화

멀리서는 희망이라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넉잔


그대여, 그대들이여

멀리서는 진부하다네 나는 백화수복을 마시네

 

한우진 시집 까마귀의 껍질(2010)

 

 

 


hanwoojin-140.jpg


2005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까마귀의 껍질』지상제면소

2007년 경기문화재단 창작지원기금과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기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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