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행 / 김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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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10회 작성일 21-11-22 20:28본문
초행
김희업
시간이 빨래를 말린다
빨래가 빨리 말라 갈수록 밤은 더디 마른다
하늘은 구름을 말끔히 걷어내고 새 단장을 했다
천둥도 한 가닥 걷어내자 멍 자국이 보였다
난청의 밤이 와
소란스럽던 소리조차 침묵에 덮이고 만다
침묵은 얼마나 무서운가, 할 말을 못 하고 세상이 끝나버릴 것만 같은
밤은 서식지가 불분명한 달이 출몰하는 장소인가
밤은
이런저런 생각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송곳의 시간인가
빼뚠 글자를 수선해 가면서
밤새 밤도 모르는 줄거리를 찾아 밤을 이어 붙인다
어둠을 덮고 자는 밤에는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게 되어
우리의 동공은 더욱더 캄캄하구나
해마다 겨울은 처음인지라
한 발 물러서 나는 봄 쪽으로 걷게 되었고
그때부터 길은 나와 어긋났다
내 그림자를 밟지 못하는 나는 평화주의자인가
4월을 걸어서 갔다, 이 길로 곧장 가면 나를 만날 수 있으려나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나를 향한 걸음은 이리도 무거워라
도착하니, 나를 빼닮은 그림자 나보다 먼저 잠들고
어디서
마르지 않은 젖은 마음이 다가와 묻길,
오늘 밤은 초행이지?
ㅡ웹진 《문장》 2021년 11월호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칼 회고전』 『비의 목록』 등
제17회 천상병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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