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 임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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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임혜신
그리고 이상한 가을이 찾아와
초소처럼 서 있던 생선가게에 불이 꺼지고
선착장을 날던 드론들도 사라져
만년 시계*인 양 긴 불면에 드는 모래둔덕
가문 좋은 금속들만 시간의 페달을 유유히 달리는
이상한 밤이 찾아와
철 늦은 소금장미 들창에 피어나고
러시아풍 선술집에서 젖은 럼향기 풍겨올 때
나, 베라를 생각하네
내다 팔지도 않을 호박을 심고
잡아먹지도 않을 닭들을 키우던 눈물 많던 베라
애인 잃은 친구를 찾아가 제 것인 양 3년을 울던 베라
더 이상 크리넥스 집어 주기 싫다며 너도 나도 등 돌렸던
아더스 버트란드 얀의 ‘휴먼’
페이지 178쯤에서 만날 것만 같은 흰 얼굴과 빨간 볼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간다던 밤을 생각하네
큰일이 났다고,
캄캄한 베링 해협같이 꿈틀대는 전화기 속에서
베라가 울지도 않던 밤을
* 텍사스 서부 산속에 설치되고 있는 이 시계는 초침이 일 년에 한 번 째깍거리고,
분침은 백 년마다 움직이며 천 년에 한 번 뻐꾸기가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임혜신 시집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상상인, 2021)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학교 국어과 졸업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공대 졸업
1995년《워싱톤 문학》, 1997년 <미주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환각의 숲』『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미국시 해설서 『임혜신이 읽어주는 오늘의 미국시』
공저 영시집 『Korean-American Poetry Anthology』
2009년 미주시인상, 2010년 해외문학상, 2021년 해외동주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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