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밥 / 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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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밥
- 스무 살의 너에게
문성해
처음 밥을 짓는다는 건
어느 늦가을 어둑어둑한 목소리의 부름을 받는다는 거,
집에 밥이 없으면
식은 밥통에 슬슬 눈이 가는 나이야
처음 밥을 짓는다는 건
희게 재잘거리는 쌀들 속에
보드라운 너의 손을 꽂아본다는 거
너의 이름을 밀어 넣는다는 거,
너는 이제 밥이 그냥 오는 게 아님을 아는 나이
비 갠 여름 오후의 그늘에서 밥이 이팝 꽃처럼 스르르 풀려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너와는 상관없이 온다고 알았던 신비스러운 나이가
이제 너에게는 없단 거
슬프지 않은가,
밥이 없는 초저녁의 쓸쓸함을 아는 나이가 된다는 거,
그래서 유리창에 어둠의 고함소리가 닥치기 전에 슬픔을 휘젓듯 쌀을 씻고
푸푸 밥이 되는 소리에 조금씩 안도하는 나이가 된다는
이제 밥은 구름이나 바람, 적어도 너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저 둥글고 깊은 구형 전기밥솥의 동력으로 지어진다는 것을 알아버린 너는
이제 딱딱한 지구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
무엇보다 이 세계의 신비한 마술쇼가 끝났다는 거
―계간 《상상인》 2021. 1월호
경북 문경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자라 』『 아주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내가 모르는 한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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