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없는 질문 / 천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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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없는 질문
천수호
사랑이 좋을 때 수선화에게 사랑을 물은 적 있다
꽃의 죄는 대답이 샛노랗다는 것
누워 있어서 죄가 더 많이 보이는 날이면
사랑은 벌써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랬다
천리도 아니고 만리도 아닌 아득한 길을
노란 꽃으로 흔들리며 가는 네 모습을
끝까지 봐주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 게 아니랬다
그땐 웃을 수 있었다 그 색깔이 거기 있다고 믿었으니까
꽃잎에서 시작된 뒤척임이 하루를 구근으로 뭉친다는
바람의 이야기는 믿을 만 했지만
어찌 색을 두고 흔적 없이 사라질 궁리를 했는지
사랑이 좋지만 않을 때 가만가만 물어보는 것이었다
대답 대신 한 두 장의 풍경만 가만히 보내오고
그것이 색 없는 고궁(古宮)이라 어둡다는
벽돌 사진 한 장도 무심히 끼워 보내오고
천천히 문을 여는 메신저의 반응만이 아득한 기별이 될 때
이런 사실은 사랑을 꽃에게 물을 때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랬다
사랑이라 부를 때가 많았던
그때는 보이지 않던
느린 걸음으로 꽃이 걷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계간 《포엠포엠》 2021년 여름호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명지대 박사과정 수료
2003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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