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테라스 작업 / 김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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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80회 작성일 22-02-09 12:08본문
혜화동, 테라스 작업
김이강
머리가 조금 벗겨진 에릭은 턱을 괴고 있을 때가 많다.
에릭은 그 책을 보며 놀랐다. 왜 나에게 이런 걸 주는 거야? 그런 표정이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데 우리 모두 그걸 잘 찾지 못했다. 그냥 선물이야.
그것은 어느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문학 계간지였다. 에릭의 표정을 보고서야 나는 몇 개의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글이 인상적이었어. 이런 이름도 인상적이지.
인상적이라니? 그런 표정을 누르는 표정으로 그는 유심하고 무심하게 내 손끝을 보고 있다.
이 손을 그만 치워야 하겠지. 생각하지만 그것은 계속 간다. 느리고 지루하게. 점자책을 읽는 것처럼 한없이.
모든 것이 서툴러져 가는 동안
에릭이 앉은 의자 모서리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다음은 에릭의 차례일 것이고, 다음은 내 차례가 될 것이다.
용해되지 않는 분말로 남아서
우린 어떻게 될지.
나는 드디어 책을 덮는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에릭이 방전되고 있는 것을 본다. 가을이 넓어져서 곧 우주가 될 것 같다. 밀도가 낮아진 공기가 서늘하게 우리 사이로 밀려들면 에릭의 가죽 점퍼도 눈에 띄지 않게 수축해서 색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런 것이 전부인 날들.
맥주와 커피를 동시에 시켰다. 날은 미세하게 흐리고 딱딱하다. 이런 날씨엔 아무도 테라스에 앉지 않는다. 아직 턱을 괸 그것이 마지막까지 테라스에 남아 있다.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2월호
1982년 여수 출생
2006년 겨울 《시와 세계》로 등단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타이피스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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