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공식 / 이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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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공식
이기와
칼을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빈틈없이
아니다, 계절은 없다
생명이 살해된 마당에 마른 목을 접고 앉아
숫돌에 응징의 칼을 가는 자에게 계절은 없다
분노의 울렁임을 칼날이 알아듣도록
저주의 소름을 칼날이 흡수하도록
바람이 구름을 내몰 듯 침묵의 변방에 꿇어앉아
분노의 윤곽이 유리꽃병처럼 뚜렷해질 때까지
응어리진 칼을 간다
꽃꽂이를 하듯 손을 델 수도
물을 갈아 줄 수도 없는
멍빛 눈물로 깊어진 분노의 심층에서
안쪽 날을 갈다 보면 칼날이 바깥으로 눕는다
분노는 중심을 지킬 때 예리한 법
칼 가는 그를 옹호하듯 등 뒤에서 복사꽃 핀다
분노의 집중과 분산에 따라 칼날이 섰다가도 눕는다
칼날은 섰다가 눕기를 반복하면서
나이가 차고 세월을 먹는다
갈고 갈다 어느 날 안팎이 닳아 칼등만 남은 칼
칼등마저 갈고 나면
어느 새벽 칼은 없다
그는 쉬지 않고 칼을 간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칼을 허물었던 것
응징이 자기한테로 향해 칼집에 꽃을 꽂게 하기도 한다
―계간 《문학과 사람》 2021년 봄호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그녀들 비탈에 서다』
산문집 『시가 있는 풍경』 『비구니 산사 가는 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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