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을 열면 / 최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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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을 열면
최금진
꽃다발을 쏘아 올릴 기세로 밖을 겨누는 대포가 있어요
고작 일 년에 한 번 꽃잎을 명중할 뿐이에요
향기의 곡사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움푹 파인 싱크홀이 생겨요
아름다움을 빗대어 자신을 겨눈 탓이지요
크리스마스에는 아군도 적군도 다 전쟁을 멈추지만
개미들은 꽃들이 낳은 알을 몰래 나르며 지구 반대편에 쌓아둬요
보이지 않는 도화선이 연결된 셈이지요
암담한 상황, 세계는 평화에 취약한 코를 달고 있지요
향기를 위장하기 위해 국가기관마다
지하에 벙커를 파고 비상식량처럼 거울을 보관해요
거울은 보안을 위한 완벽한 후각을 가졌어요
향수병을 열면 흰옷을 입은 거미들이
장부를 펼치고 향기를 갚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요
아름다움을 멸시하기 위해 생을 허비한 한 여자의 이름을요
인샬라, 아름다운 것을 모욕한다면 반드시 복수가 뒤따라요
향기를 잔뜩 비축했다가
단번에 소문의 근원지인 꽃밭을 폭파할 수 있을까요
이 작은 기원으로 세계에 평화가 올까요
독을 품고 잉잉대는 꿀벌들에게서 달콤한 꽃향기가 나듯이
조심하세요, 꽃에는 유황과 몰약 냄새가 나요
향수병을 열면
철모처럼 생긴 꽃들이 최전방까지 향기를 나르고
종일 이빨을 덜덜 떨며 우는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있어요
꽃의 사상을 전파하기 일생 자신을 허비한 죄를 지었죠
만약 오늘 세상에 전쟁이 난다면
그 진원지는 바로 이 작은 향수병입니다
UN 창립 75주년인 올해, 꽃가루 축포가 펑펑, 쏘아 올려집니다
―계간 《시현실》 2021년 겨울호
충북 제천 출생
199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1년 《창작과비평》신인상
시집『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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