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치는 세계 / 정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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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치는 세계
정한용
손 닿는 곳마다 책을 늘어놓고 동시에 여러 권을 읽곤 한다.지금 방바닥에는 베개로 써도
좋을 만큼 두꺼운 사진 이론과 한시 선집이 있고, 의자 옆에는 소설 두 권이 나란히 포개져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 가벼운 책과, 늦은 밤 읽기 위한 좀 무거운 책도
대기 중이다. 책을 섞어 읽다 보면 새로운 책이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 읽던 <풍아송>과
<바다의 선물>을 방금 들추니, 주인공이 바뀌어 있다. 양커가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 가서
시경을 연구하고, 베르너폰이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침묵하고 있다.
<거짓말의 탄생>과 <평범한 인생>을 펼치니, 여긴 더 꼬여 있다. 정한용이 철도역에서 깃발을
흔들다, 아, 지겨워, 무단이석하며 사고가 나고, 원래 복무하던 철도공무원은 보르헤스가
보냈다는 편지를 읽으며, 개새끼들!, 술주정하고 있다. 이해 불가라 여기시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원래 인생이란 뒤죽박죽 비빔밥 같아야 제맛이 날 터. 나는 조심 두 손으로 네 권의
책갈피를 넘겼다.
―계간 《사이펀》 2022년 여름호

1958년 충북 충주 출생
경희대 문학박사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1985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 시작
시집으로 『얼굴없는 사람과의 약속』 『슬픈 산타페』 『나나 이야기』
『흰 꽃』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영문시집 『How to make a mink coat』
평론집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 『울림과 들림』 등
2012년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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