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비검을 휘두르다 / 박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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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35회 작성일 22-10-21 16:51본문
물의 비검을 휘두르다
박현솔
그곳의 상류에는 물이 시작된 흔적이 있다
돌멩이가 바람에 눈을 뜨고 물줄기가 햇볕에 나뒹굴고
가는 맥이 한 땀씩 뛰는 동안 길을 터주는 땅의 축원
힘없는 물줄기는 색이 바랜 잎사귀를 들추고
시간의 둘레를 둥글게 더듬으면서 흘러간다
두려움을 잊어야 그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지
아직은 큰 물길을 거느리지 못했지만
물의 자손으로 태어나 어길 수 없는 율법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
지친 새들의 날개를 적셔주고, 은신처가 되어주고
쫓기듯 걸어온 길들의 마른 목을 축여주며
큰 물길로 가는 도량과 넉넉함을 수행하는 것
부피가 조금 늘어난 물줄기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린 물의 험난한 도정이 망망대해를 향해 흘러간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어린 물의 순례는 큰 바다를 만나야 완성된다
경사진 곡벽에서 무수히 떠도는 물의 위협을 받고
어느 협곡에선 물의 비검을 휘두르는 소용돌이의 시간들
물길을 내는 것은 어린 물 자신이어야 한다
물에 비친 눈빛이 두려움을 벗고 예지로 빛날 때
험난한 도정의 끝에 비로소 큰 바다가 보인다
―박현솔 시집,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 (문학과사람, 2018)
제주 출생
아주대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9년<한라일보>신춘문예와 2001년《현대시》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
저서『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등
2005년과 2008년 한국문예진흥기금 수혜
경기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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