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다투다 / 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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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다투다
백무산
고약한 이웃을 두었다고 투덜댔다
마을 좁은 길가 외딴집 헐어낸 자리
자갈투성이 땅을 허리 굽고 억세고 그악스러운 할머니
밭을 일구느라 가뜩이나 좁은 길을 파먹고
자갈 풀뿌리 던져놓아 질척한 길을
발을 들고 건너며 사정도 하고 짜증도 내어보지만
흙이라도 파먹어야지 길에서 뭐가 나오나? 막무가내다
또 봄이 오면 다툴 게 걱정이다
그 밭이 조용하다
봄이 오고 건너 밭에 씨감자 내고 모내기철이 끝나도록
기척이 없다 장마가 지나가고 뻐꾸기가 울고
작년 밭고랑이 다 지워지도록 호미질 소리 없다
꽃뱀이 와서 교미를 하고 쑥부쟁이 흐드러지도록
할머니 기침소리 없다
여윈 손목 자루로 여문 땅 괭이질로 다 일구고는
겨우 두해 부쳐먹은 그 밭머리에서 나는 자꾸만 목이 멘다
날선 내 말이 가시는 길바닥에 가시가 되진 않았을까
꽃을 피게 하는 일과 마음의 짐 한줌 덜어주는 일
그보다 더 잘난 일 세상에 뭐길래 나는 닳고 닳도록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길을 끌고 다녔을까
이 들에 바람과 다투는 자는 나밖에 없구나
―백무산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

1954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 1집에 '지옥선'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이상문학상, 만해문학상 수상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초심 』
『길밖의 길』 『거대한 일상』
『폐허를 인양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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