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 소리를 수확하는 계절 /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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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00회 작성일 22-11-24 13:47본문
풀벌레 소리를 수확하는 계절
마경덕
바람의 체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열린 벌레소리가 익었다
방울벌레 풀종다리 철써기 귀뚜라미
잡초가 소리를 수확하는 계절
제초제를 뿌린 곳에는 소리의 씨가 말랐다
여름내 소리를 키우느라 허리 굽은 하천가 방가지똥 고마리
오가는 발소리에 흠칫 일손을 멈춘다
땡볕 아래 그늘을 짜고 품에 맞는 어둠을 들인 건
누대를 이어온 그들의 농사법
바람에 혀끝이 서늘해질 때
으슥한 둑길에 떨어지는 맑고 처량한 소리
잘 여물었나,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완숙한 소리만 골라 출하하는 야간작업장
물기가 말라 또르르, 먼 곳까지 굴러가면 상품이다
달빛과 주고받는 저 밀거래
제철에 거둔 소리의 값은 얼마일까
만돌린 켜는 풀종다리, 양금을 두드리는 방울벌레
잡초들이 재배한 완벽한 합주는 어느 악기보다 귓맛이 좋다
그들이 소리를 키운 지는 오래지만
맑고 구슬픈 소리가 잡초의 농사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리가 젖으면 무거워 구르지 못한다고
일손을 놓고 풀잎도 쉰다
그런 날은 둑길에 빗소리만 왁자하다
―마경덕 시집, 『그녀의 외로움은 B형』(상상인, 2020)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그녀의 외로움은 B형』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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