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 / 이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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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48회 작성일 23-01-01 11:45본문
행간
이기철
행간을 돌아 나오는 동안 가을이 저물었다
오후 6시의 행간은 정원보다 깊다
원시原始로 가려면 낙엽신발을 신어야 한다
한 번도 휴식해 본 적 없는 태양과
잠을 모르는 지구가
고대의 말소릴 잊지 앉고 여기까지 데려왔다
소리의 칸칸을 지나면 몸 안의 각지各地에 파도가 인다
그 지명들을 내 편애의 언어로 불러내면
불현 듯 고왕국으로 가는 차표를 사고 싶어진다
진번 임둔으로 가는 매표구는 어느 페이지에 있을까
바빌론 카르타고로 가는 선편船便은 어느 쪽에 있을까
목차를 매표하는 동안 참깨 씨가 재재발리 저녁 종을 친다
설화의 사랑에 열광했던 낙랑을 생각하며
나는 비로소 페이지를 닫고
바이칼로 가는 길을 묻는다
가위로 자른 저녁놀이 색실처럼 풀려 어깨에 걸린다
먼 곳은 멀어서 더욱 그립다
—이기철 시집,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 2022 목월문학상 수상시집
1943년 경남 출생
영남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가장 따뜻한 책』
『스무살에게』 『정오의 순례』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영원 아래서 잠시』
평론집 『문예창작』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 등
소설집 『리다에서 만난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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