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고궁 산책 / 이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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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10회 작성일 23-01-10 12:19본문
한낮의 고궁 산책
이다희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나도 노래를 잘 부르고 싶어져
나에게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보는 것을 당신들도 봅니까
초조할 때마다 귓불을 만지는 건 오래된 습관이고
왼손을 들어 왼쪽 귓불을 만지작거리면 안심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귓불을 만질 때 슬며시 초조해지기도 했지
초조하다는 건 문밖에 오래 서 있었다는 뜻이죠
어제는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았습니다
비 온 뒤 거미줄은 위험하게 반짝거려
누군가 힘껏 허공을 향해 뛰다 허공에 부딪친 자국 같아
여기까지라는 표시 같아요
해봤는데 여기까지였다고 말을 하네
남의 집을 내 생각대로 만들어놓고 주변을 둘러봐
여기는 왕이 잠시 살았다는 곳인데 산책하기 좋은 곳이군
나는 이곳에 살아본 적 없어서 살아도 좋은 곳인지 모르겠지만
산책하기 좋은 곳임에는 틀림없어
하지만 이제는 거미도 없고 왕도 없네요
왕도 비를 맞은 적이 있을까
입고 있던 옷이 짙어질 때 왕은 난처했을까
햇빛을 받아야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목을 빼고 얼굴 가득 햇빛을 받아요
햇빛에 더 깊숙이 얼굴을 파묻어요
깊이 파묻으려 할수록 고개를 더욱 높게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듭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요 이제는 나왔던 곳으로 들어가봐야 합니다
―이다희 시집, 『시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1990년 대전 출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시창작 스터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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