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수집가 / 김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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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수집가
김향미
옆 좌석 승객이 목을 조른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가방을 뺏으려 한다
여기, 살려 주세요
거기, 이 소리 들리지 않나요
끝내 터져 나오지 못하는 비명은 발버둥의 크기로 가늠이 될 테지만,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저항의 포기가 깊은 깨달음이라 생각한 적 있다
커다란 여행가방, 안에는
검은 나뭇잎과 푸른 눈발, 거짓의 혓바닥을 수없이 잘라 담았다
간혹 조인 숨통을 틔워 나의 발버둥을 즐기는
그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태어날 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던 것
모두가 귀가를 서두르는 중이다 버스는 노선을 벗어나지 않고
승객들, 묵묵히 큰 가방이다 기사와 승객, 모두
한통속일지도 모른다 버스의 좌석이 운명을 좌우한다
가방을 그냥 줄 수도 있었을 거다 이미 의지 밖으로 벗어난 건지도 모른다
저항이 포기되지 않는 건 깊이 꿈꾸기 때문이다
가방이 부려진다
여기는 꿈의 바깥, 검은 나뭇잎 뒹굴고 푸른 눈발 덮쳐오는 잿빛 숲이다
—계간 《시와 반시》 2023년 봄호

1966년 경북 안동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유심》을 통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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