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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의 독서 / 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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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795회 작성일 15-07-17 08:31

본문

못의 독서

 

 길상호

 

 

그날도 날아든 낙엽을 펼쳐들고

연못은 독서에 빠져 있었다

잎맥 사이 남은 색색의 말들을 녹여

깨끗이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초겨울 가장 서둘러야 할 작업이라는 듯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침묵만 남아 무거워진 낙엽을

한 장씩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서

물살은 중얼중얼 페이지를 넘겼다

물속에는 이미 검은 표지로 덮어놓은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못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래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어도

이야기의 맥락은 짚어낼 수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그림자를 뜯어

수면 아래 가만 내려놓고서

비밀처럼 깊어진 연못을 빠져나왔다

그날 읽을 것도 없는 나를 넘기다 말다

바람이 조금 더 사나워졌다

 

 

kilsh.jpg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오동나무안에 잠들다』『모르는척』『눈의 심장을 받았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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