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가게 / 강은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460회 작성일 24-06-30 20:48본문
환상가게
강은교
5시쯤 되었어요, 내가 N읍에 도착한 것은, 능소화 칠을 한 벽, 윗부분은 붉은 벽돌, 노을이 벽을 받치고 있는 느낌, 꼬리에 긴 그림자를 매단 사람들이 유리문 안으로 사라지고, 혹은 헐떡헐떡거리는 버스 앞에 웅성웅성,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말다툼 소리, 한껏 차려입었다,
먼지 가득 앉은 녹슨 검은빛의 중절모, 옆구리까지 기어 올라간 잿빛 옷소매 터질 듯, 값싼 도금의 귀걸이, 구슬 박힌 구식의, 핸드백,
캐리어를 끌고 느릿느릿 읍내를 걸어간다, 허름한 유리창마다, 혹은 지붕 밑에 앉아, 노을에 하품하듯 미래식당, 미래부동산, 미래횟집, 미래슈퍼, 미래편의점, 미래커피숍,
잠시 쉴 겸 노을 드리운 미래커피숍 유리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 부분만 환하게 스프레이로 금빛 햇살을 뿜은 듯한, 커피숍에 어울리지 않게 키 큰 책장이 한쪽 벽에 서 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카드를 카드 기계에서 뺀 다음 주춤거리며 책장에 다가가 책 한 권을 뽑아 든다,
“환상 깨기” 첫줄을 읽는다. ‘우리는 너무 환상에 빠져 있다’, 그렇게 시작되는 그 책,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책장을 넘겨본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끄떡이며 우선 커피의 환상부터 깬다, 목마름을 축여주리라는 그 환상, 달콤하리라는 그 환상, 그 환상, 깨고 깬다,
홀 한구석, 노트북을 켜는 청년이 보인다, 페이지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환상을 깨게, 그 책의 저자를 넘어서리라는 환상을, 한 명제 뒤엔 늘 다른 명제가 나타나지, 저자만이 아는 명제가,
노을의 반대쪽, 움푹 파인 것같은 어둠 속에 계단이 보인다,
‘아메리카노 환상커피’를 든 채 계단을 조금씩 오른다, 계단은 나선이다. 계단은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는 것도 같다, 벽에 뿔이 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뿔을 잡으며 올라간다, 한참을 올라가고 올라간다, 자그만 유리문이 나타난다, 그리로 들어간다, 줄들이 방 한가득 쳐져 있다, 들어오지 말라고?
나는 깡충 뛰어서 줄을 넘는다, 또 줄이 나타난다, 나는 또 깡충 뛴다, 깡충깡충, 깡충깡충, 깡충깡충,
줄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나는 넘어진다, 이윽고 도착한 유리창,
유리창 밑을 내려다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노을만이 가슴께에서 시간의 실을 쏟아내며 길게 누워 있을 뿐,
나선의 계단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가는 논둑길로 캐리어를 끌고 간다, 피곤해진 나는 이제 왼쪽 다리를 절름절름거린다, 저쪽에서 한 노파가 보행기를 밀며 전신주 그림자들 사이로 다가온다, 늙은 여인은 나에게 말을 건다, “보행기를 밀고 다니시구려, 너무 힘들어 보이네”, 늙은 여인은 쯧쯧거린다 “어디 가면 살 수 있죠?” “저기 읍내에 가면, 슈퍼가 하나 있어요, 미래슈퍼라고…… 그 옆 ‘환상가게’에 가면 있어요”, 노파는 ‘환상가게’에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한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 고모가 그림자들 사이로 끼어든다, 아, 고모, 늘 사라지는, 수천 년 같은 당고마기고모, 걸어온 길은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늙은 여인도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6월호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1968년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
1968년 ≪사상계(思想界)≫로 등단
시집 『빈자 일기』 『소리집』『붉은 강 』 『우리가 물이 되어』 『바람노래』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초록 거미의 사랑』 등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