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과 나 /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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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726회 작성일 24-09-22 22:30본문
닭과 나*
나희덕
닭과 나는
털이 뽑힌 닭과 벌거벗은 나는
함께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오그라든 팔로도 만질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듯
말라빠진 다리로도 걸어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듯
닭에게 두 날개가 있다면
나에겐 두 유방이 있지요
퇴화한 지 오래이거나
조금은 늘어지고 시들긴 했지만
날개와 유방은
우리를 잠시 떠오르게 할 수 있어요
시간을 견디게 하고 기다리게 하는 힘이지요
닭과 나는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고
서로의 손발이 되어 주고
서로의 바닥이 되어 주고
서로의 방주가 되어 주고
서로의 뮤즈가 되어 주고
서로의 비유가 되어 주고
나의 머리가
점점 닭벼슬에 가까워져 갈 때
닭의 목은
점점 나의 목처럼 굽어져 가지만
닭과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에요
서로를 태우고 앉아 같은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 먼 곳을
*수나우라 테일러, <닭과 함께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Chicken>(2012)
―《문장 웹진》 2024.9월호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 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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