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죄 / 정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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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죄
정영주
빈집에 불을 켜고 있는 건 배롱나무더군요
한쪽 창이 환해지면서 꽃 심지가 창가로
옮겨붙는 걸 보았습니다
꽃들이 폭죽처럼 툭툭 터지고
감나무를 감고 오르던 적막 한 점이
허공에 냉갈빛 금을 긋던 어치새의 부리에
여지없이 쪼이더군요
그 찢어진 적막 사이로 따뜻한 기운들이
때죽나무 잎으로 엉겨드는 걸 흔적 없이 보았습니다
빈집일수록 나무들의 수화가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지요
문득 집 안이 궁금해졌습니다
창가로 흘러 들어오는 배롱꽃불 앞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정말 즐거운 죄였지요
기왕지사 악동이 되었으니
수런거리는 당신의 정원을 더 어지럽히고 가야겠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당신의 정원은 깊고 황홀합니다
부디 오래오래 머물다 오십시오
당신의 정원은 나그네에게 친절할 뿐, 제자리를 지키니까요
내일이면 여긴 꽃불 터지는 소리로 요란할 것입니다
배롱나무들 꽃대 하나하나에 붉은 신열이 돋고 있으니까요
오므라진 꽃술들이 탱탱이 뜨겁습니다.
―정영주 시집, 『달에서 모일까요』 (상상인, 2025)

서울 출생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199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버지의 도시』 『말향고래』 『달에서 지구를 보듯』 『달에서 모일까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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