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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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1967년 전남 보성 출생
2001년 《실천문학》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
산문선집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등 다수
제29회 신동엽창작상, 제6회 김진균상
제12회 천상병 시문학상, 제16회 고산문학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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