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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만 / 해자의 추억 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8건 조회 9,884회 작성일 17-08-31 17:36

본문

고성만 시인을 9월의 초대시인으로 모십니다.

 

 

고성만 시인은 동서문학으로 등단하여 마네킹과 퀵서비스맨

많은 시집을 상재한 바 있으며,

 

살아가면서 인간이 느끼고 맞닿아 있는 다양하고 원초적인 슬픔을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늬로 표현해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시편들은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촉촉한 유년의 추억과 함께 상상을 통한 삶의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고성만 시인의 촉촉한 시와 함께 아름다운 가을 열어가시기 바랍니다

 

 

=======================================

 

해자의 추억 외 9편 / 고성만

  

고립을 즐겨하면서부터 나는

해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녀와 시동들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낸 중세 영주같이

적막이 말랑말랑해지도록 씹고 또 씹었다

 

물이 벙벙한 연못에

흰 꽃송이처럼 떠다니는 오리들 어쩌다

도개교를 열고 미끄러지듯 흘러들어오는

시정의 어지러운 소문들

장엄하게 나뭇잎이 지고 있었다

별들이 밤을 새워 천체를 운행하는 동안

아아, 사직을 떠받치던 충신들

국가를 경영하던 집사들은 죄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서둘러 짧아지는 햇살

깊어가는 어둠 속

 

오사카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구름과

시에라네바다 산록에 휘날리는 눈발은

어떻게 다른지

소리 없이 나는

나를 묻는다

 

 

 

 

 

물방울

 

 

저기 저

푸른 비단을 구르는

진주 방울 좀

보아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나무 끝 잎사귀 위

사뿐 내려앉아

무지갯빛 밝혀주는

물의 방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손잡이가 없어

서성

서성이네

  

 


생레미, 18896~ 광주, 20125

 

  

   여기는 지금 백양나무가 푸른데 그곳에도 더위가 시작되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은

바퀴 소리에 묻혀

  긴긴

  기차는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떠나고

  걸어서 언덕에 다다랐다

  배배틀린 사이프러스 나무 위

  별이 빛나는 밤

  테오야, 때론 미칠 것 같구나 엊그제 병원에 다녀왔는데도 알약을 한 움큼 씩 먹어야 잠이

드는 생활 속 내가 사랑한 사람은 나를 떠나고 나를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잎사귀 같은 귀 하나 

  뚝뚝 떨어지는 피

  멀쩡한 산과 들 까뒤집어 도로 만들고 수많은 생명 꿈틀거리는 하천 파헤쳐 콘크리트로

덮고 아름다운 바다 막아서 군사기지 세우고 힘없는 서민들 짓밟아 대기업 살리고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세차게 쏟아지는 비

  망각은 훌륭한 치료제라는데

  도무지 잊을 수가 없구나

  노란 실 뭉치처럼 커졌다가 오색의 불꽃으로 터트려지는 하늘

  왁자지껄 쏟아져 성급하게 뜨거워지는 햇살 속에서 나는

  냄비처럼 끓어

 

 

 

비얌*

 

 

 

   비단헝겊인가 했더니 햇살이었다

   어쩌면 저리 아름다운 무늬일까 했더니

   오색단풍이었다

 

   사라진 종소리를 찾아 헤매다가 시장으로 가서 국밥에 막걸리 두어 잔 걸치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계곡물이 마르는 오후

 

  그림자의 긴 혀가 다가와 손등을 핥았다

 

   징그러워라!

 

   적막이 종을 들어 나뭇가지에 걸어두자 모과와 감이 텅텅 울렸다

 

   산등성이 힘들게 기어올라 산마루에 이르니 키 작은 나무로 허공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저녁,

 

   시린 물소리가 계곡을 타고 내려오자 소리의 볼이 빛났다

 

   갈수록 길어지는 밤을 위해

 

   깜박 밝혀둔 외등같이

 

   어쩌면 저리 슬픈 노래일까 했더니

    억새 숲을 스치는 바람이었다

 

 

   * 뱀의 사투리

 

 


 

구제역

 


가족과 함께 서래봉 오르기 위해

정읍시 내장동으로 들어가는 도중

길 가운데 놓인 방역분사기를 지나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마스크 쓴 소들이

가축우리에 갇힌 축산농민을 끌고 나와

커다란 트럭의 짐칸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발굽이 심하게 갈라진 채

피가 질질 흐르는 돼지들이 꿀꿀거리면서

비쩍 마른 아이와 노인들을

깊이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자

살아도 죽은 목숨, 죽여라 죽여

동학농민군처럼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

트랙터 몰고 나와 전봉준처럼 누런 보리밭을

갈아엎는 남자들

어둠이 검은 것은 슬픔 때문이다

 

탈레반 모자를 쓴 소년들이

부르카 입은 소녀들의 손을 끌어

이어달리기하듯 들어간 숲 속

축제 벌이듯

푸드득 푸드득 날아다니는 닭과 오리들

당황한 관계당국에서는 휴교령을 내리고

방역을 더욱 강화했지만

먼 조상이 난생이었으며

초식동물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불출봉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내장산을 뒤돌아 내려오는 유월

 

 

 


줄무늬스타킹을 신은 사내

 


  맨몸에 줄무늬스타킹 신은 채 승용차 세워놓고 꿀꺽꿀꺽 침을 삼킨다

 

   햇살 바람 안개 비…… 손 타지 않은 것들만 이 세상 처음인 것들만 소리 지를

자격이 있지 비명을 듣고 싶어

 

  오른쪽으로 성당 왼쪽으로 여학교가 보이는 언덕에 이르러

  날로 회쳐 먹어도 비린내조차 나지 않을 저 미끈하고 통통한 물고기들 바라본다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퉤, ,

 

  와락 달려든다 겁먹은 얼굴, 애원하는 눈빛, 입을 막는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부화하기 직전의 알처럼 말랑말랑한 소녀여

   

  후생엔 너의 딸로 태어나고 싶구나 도망 가버린 아내와 자식들 찾으러 헤매고 또 헤매던 나날 동안

 

  전자발찌만 아니라면 으이그 이걸 콱!

   

  손을 풀어 놓아주고 차가운 우의 속에서,

 

  운다

 

  이미 늙어버린 소녀와 함께

   

 

 

 

꼬리


 

누구는

척추가 길어진 거라 했고

누구는 창자가 빠져나온 거라 했는데

면접시험 칠 때

애인과 마주 앉을 때

존경하는 시인을 만날 때는

밟히지 않도록 조심했고

돈 많은 사람

낯 두꺼운 사람

여유 넘치는 사람 앞에서는

슬쩍 꺼내어 살살 흔들었던,

차마 내키지 않는 일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일

참을 수 없이 화나는 일에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파르르르 떨리는 그것

 

 

 

 

귤 맛 어둠

   

 

해안선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창문마다 등이 켜진다

    

난로에는 장작이 타고 있다 불꽃이 환하다 주전자의 물이 끓는다 손등이 뜨겁다 속살이 익는 느낌이다

눈송이가 노란나비 떼처럼 날린다

시디신 해를 숨기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

    

톡톡 알갱이가 터진다 입 안을 헹구는 향기

수북이 쌓여있는 껍질은 입술을 닮았다 버스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 나오기를 기다린다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묵묵히

귤을 까서 먹는 동안

장작불은 꺼지고

꿈은 달콤하다

   

옛날부터 이 섬엔 뱀과 새가 많았다 자꾸 교미하여 자손을 퍼트렸다 뱀이 세운 나라와 새가 세운 나라

멸망했다 일어서고 다시 멸망한 나라

    

비밀을 발설하면 불행해진다 불행은 귀에서 귀로 전해질 것이다

 

 

 

 

나는 빙하처럼 어둡다

    

 

   컹컹 개가 짖을 때마다 요란하게 물드는 산기슭 목줄 끊고 달아난 개가 으르렁거릴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잎들 유독 커다란 밤나무가 있는 마을에 마음을 빼앗겨 그 아래 머물렀는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이 울려 퍼지는 밤

   황금리를 찾아 헤맨다 상설 시장 입구에서 만난 여자에게 묻고 바바리코트 입은 남자에게 묻고

트레이닝 복 차림의 아이에게 묻고 성경 책 든 할머니에게 물었지만

    

   월정교에서 하차한 나는 배낭같이 무거운 구름을 지고 과연 이 계절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자욱한 안개 속

    

   산 하나 통째로 품은 빙하처럼 나는 어둡다

 

 


 

중국식 안마 의자가 있는 방

   

 

   여자가 겨드랑이를 닦는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계단 끝 막다른 방에 이르러서야 얼굴 모양 홈이 팬 나무 탁자 하나 서랍 달린 가구

하나 마른 침대보 깔린 안식, 서른 몇 쯤 되었을까 힐끔 돌아보는 눈초리가 바르르 떤다 아래로 축 쳐진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약간 미지근한 수건으로 덮어준 뒤 간난아이 다루듯 정성스레 문지르는 여자의 손이 다리 허벅지 거쳐 꼬리뼈

지나갈 때 둔중하게 흘러나오는 신음

    

   낮은 음역대를 지배하는 삶은 훨훨 날아오를 줄 모르는 것이어서

 

   싸리울 지나 초원을 건너 산맥을 넘어 고원으로 가는 중

  

   매양 불시착한 곳은 전신거울이 있는 지하

   여자가 팔꿈치와 무릎으로 갈비뼈 드러난 사내의 이승을 덮어준다

   

​=================

1963년 전북 부안 출생

1998<동서문학> 등단

시집 올해 처음 본 나비』 『슬픔을 사육하다』 『햇살 바이러스』 『마네킹과 퀵서비스맨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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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임기정님의 댓글

profile_image 임기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서 오십시오
좋은 시로 만나 뵙게 되어 무지 반갑습니다.
음미하며 아주 맛나게 읽겠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9월 시인님의 달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조경희님의 댓글

profile_image 조경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성만 시인님, 시마을 초대시인으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좋은 시 감사드리며
아름다운 계절 만나시길 바랍니다

활연님의 댓글

profile_image 활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흠, 아, 슴베찌르개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행님아, 잘 계시지요..
지면을 보고 소주 한잔 권할 수도 없고...
여자만, 천수만, 고성만
에 가면 울렁거림이 생긴다. 이곳에
오신 참에 더더욱 광대승천하시고,
좋은 시 퀵서비스로...
고맙습니다.

노트24님의 댓글

profile_image 노트24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절로 미소짓게 만드는 프로필사진이 참 좋습니다^^
눈오는 날 찰칵 하셨네요..

영상시방에 영상작가님들께서
시인님 시 영상을 만드신 것 보고
저두 부족하나마 올려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따스한 차 한 잔 살포시 두고 총총~~~

대왕암님의 댓글

profile_image 대왕암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성만 시인 선생님 반갑습니다
선생님이  정성으로 만들어 올려주신 예쁜 글 잘 읽어 깊은 감상 잘하고 갑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 많은 글 올려주지면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 되시여 행복을 누리세요
선생님의 글 잘 모시고 갑니다 허락 해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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